일본인은 성(城)을 좋아한다
일본인이 어느 정도 성을 좋아하는가는 일본을 방문해보면 잘 알 수 있다. 일본열도의 북쪽에서 남쪽까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성은 각지에 있다. 그뿐만 아니라 마을 안을 둘러보면 과자에서도 건물에서도‘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일본인은 왜 성을 좋아하는가? 일본인과
성, 그 깊고도 오랜 관계를 살펴보자.
사진 제공●6=마츠모토(松本)시청, 14=히메지(姬路)시청,
2·23·24=헤이본샤(平凡社)사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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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과 성(城)
일본 각지의 성에는 매년 많은 관광객과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방문한다. 수 백년 전에 세워진 성의 무엇이 일본인을
매료시키는 것일까? 역사 속에서 성이 해왔던 역할을 언급해가며 성의 매력을 밝혀본다.
글 ●오와다 테츠오(小和田哲男) 시즈오카대학(靜岡大學)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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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쿄(皇居, 일본 천황이 거주하는 곳)일각에 남아 있는 에도죠(江戶城)망루대.
망루는 1657년에 소실되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재건되지 않고 있다. 사진=이토 치하루(伊藤千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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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역사와 그 매력
성은 인류가 외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구축한 것으로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일본에서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촌락을 보호하기 위하여 주변에 둥근 못을 만들었던 것도 엄연한 성이었으며, 고대 율령국가(7세기 후반∼10세기)가 동북지방 침공의 거점으로 삼은
타가죠(多賀城)및 중국의 당나라나 한국의 신라로부터의 방어책으로 큐슈(九州)에 지은 미즈키(水城)나 이토죠(怡土城)등도 물론
성이다. 그러나 일본의 성은 중세 무사시대를 맞이하여 더욱 그 역할이 증대되어 규모도 커지고 그 수도 많아졌다. 특히 전국시대(15세기
중엽∼16세기 후반)에는 각각의 지방영주가 영지 지배의 중심으로서, 또한 군사적 거점으로서 쉽게 함락되지 않는 성을 축조하게 되었다. 그 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의 아즈치죠(安土城),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의 오사카죠(大坂城)와 같은
호화장대한 성이 등장하여 에도시대(1603년∼1867년)로 이어졌다. 오다 노부나가 시대와 토요토미 히데요시 시대를
쇼쿠호(織豊)시대(1568∼1603)라고 부르지만, 문화사적 분류에서는 아즈치(安土)·모모야마(桃山)시대라고 한다. 이 시대 명칭은 노부나가의
거성(居城)인 아즈치(安土)성과 히데요시의 또 하나의 거성인 후시미모모야마(伏見桃山)성의 호화 찬란함이 이 시대 성곽건축을 대표한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쇼쿠호 시대와 에도 시대의 성에는 대개 텐슈카쿠(天守閣, 본성 중앙에 세운 망루)가 지어졌다. 이것은 원래 전쟁이 일어 날 경우
전망대와 사령탑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점차로 성주의 위엄을 나타내는, 이른바 상징적 비중이 높아져 외관은 물론 내부장식에도 상당히
치중하게 되었다. 흰 회반죽으로 바른 외관은 본래 방화를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그러나 흰 벽과 기와 지붕, 그리고 검은 판자 담 등의
대비가 자아내는 아름다움도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성벽에 뚫어진 원형과 삼각형 그리고 사각형의 작은 창은 그 곳으로부터 총포를 쏘기 위한
전술적인 것이었지만 그것도 일종의 조형미를 형성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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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 장군의 거성인 에도죠의 망루. 17세기 전반의 에도를 그린『에도도병풍』에서 (국립역사민속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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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왜 성을 좋아하는가? |
조형미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성뿐만 아니라 사원이나 신사 건축물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은
왜 사원이나 신사보다는 성을 좋아하는가? 첫째로는, 성에서 낭만을 추구하는 사람이 많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성에는 망루가 갖고 있는 호화
찬란한 측면과 함께 마츠오 바쇼(松尾芭蕉, 1664∼1694)가 “여름 잡초와 무사들이 꿈의 흔적이라”라고 노래한 하이쿠(俳句; 5, 7,
5음절의 단시)의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 무사들의 흥망의 무대가 바로 성으로, 성이 함락된 슬픈 전설을 비롯하여, 성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실제로 성을 찾아가 보면 그러한 전설의 분위기를 피부로 느낄 수가 있다. 둘째로는, 성을 찾아봄으로써 선인들의 지혜와
고안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성벽에 구멍을 내어 그 곳으로부터 총포를 쏘거나 창을 내 찌를 수 있는 교묘한 장치가
되어 있는 작은 창도 있다. 또한, 적이 일직선으로 동시에 성내에 돌입할 수 없도록 성문을 고안하여 굴곡을 두거나 나무 한 그루도 치밀하게
계산되어 심어져 있다. 성루나 망루에는 돌을 낙하시킬 수 있도록 고안도 되어 있어 중세·근세 무사들과 실제 축성에 종사한 기술자들의 지혜가
선명히 되살아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성이 그 지역 사람들의 상징적 존재로서 계속적인 사랑을 받아 왔다는 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45년에 있었던 공습으로 꽤 많은 성이 불타버렸으나 그 후 지역주민들의 요망에 의해 복건이 추진되어 망루가 복원된
것이 성에 대한 주민의 사랑을 잘 대변하고 있다. 또한, 망루 등의 건조물이 아니더라도 성 둘레였던 도랑과 돌담만이 남아 있다고 할지라도, 성은
그 지역 사람들의 마음에 안도감을 가져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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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히메지죠(姬路城) 탐방 |
히메지 성의 본성 망루와 작은 망루.‘치도리하후(千鳥破風)’라 불리는 산 형태의 지붕과
‘카라하우(唐破風)’라고 하는 물결형태의 지붕이 맞물리어 우아하고도 장엄함을 자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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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고 장엄한 일본의 성. 그러나 본래 성은 전쟁을 위해 만들어진 요새다. 성의 곳곳에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구조를 볼 수 있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히메지죠를 예로 대표적인 방어구조를 살펴보자.
글●사카가미 쿄코(坂上恭子) 사진●모리타케 타카시(森竹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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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성은 입지조건에 따라 산의 기복을 이용하여 지어진 산성, 평지에 세워진 평성, 산과 주변 평지를 함께 이용한
평산성으로 크게 세 종류로 나누어진다. 그 중 히메지(姬路)성은 히메(姬)산과 주변 평지를 이용한 평산성이다. 일반적으로 망루는 성의 가장
높은 장소에 한층 더 높게 세워진다. 그것은 영토를 지키기 위하여 주변을 한눈에 내려다보기 위해, 그리고 성주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망루가 있는 성 중심부를 본성이라 하며 본성을 에워싸듯이 두번째 성곽과 세번째 성곽이 나선형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 히메지 성은 정무를
주관하는 본성 외에 성주와 그 가족의 저택이 있는 두번째 성곽 및 세번째 성곽과 네번째 성곽이 지금도 본래 모습대로 남아있다. 성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이다. 히메지 성은 성 주위에 도랑을 만들어 돌담과 성벽을 세워 방어하고 있다. 또한 각각의 성곽과
통로에도 돌담과 성벽으로 경계를 만들어 적이 쉽게 침입할 수 없게 되어있다. 돌담의 특징은 ‘부채형 경사’라고 불리는 급경사. 돌담
윗부분을 밖으로 굽게 만들어 올라가기 힘들게 고안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일본 성 고유의 미적 효과도 나타내고 있다. 도랑은 대부분 물을
인위적으로 끌어들인 것이지만, 지형에 따라서는 강을 이용하기도 한다. 도랑 안쪽에는 오오테몬(大手門, 성의 정문)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문이 있다. 이곳에서부터 본성까지 가는 경로는 상당히 복잡하다. 침입자는 몇 겹의 성곽과 문을 통과하여야만 한다. 또한 통로를 따라가면 막다른
길이거나 급하게 굽어져 있어서 가면 갈수록 망루로부터 멀어지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통로도 있다. 성안 성벽에 설치한 작은 창도
침입해온 적을 퇴치하기 위해 고안한 것중의 하나. 가로로 좁고 길게 만들어진 사각형 구멍은 활을 쏘기 위한 틈이며, 원형과 사각형 구멍은 총포를
쏘기 위한 틈이다. 망루와 망대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벽면에 돌을 낙하시킬 수 있는 장치가 만들어져 있다. 일본의 근세 성곽은 이처럼
17세기 초기에 확립되었으나 그것은 동시에 270년 간 계속되는 평화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그로 인해 일본 성은 방어와 통치 기능을 초월하여
무사의 정신과 향토의 명예를 상징하는 미적 건축물로 되어가게 되었다. 히메지 성은 현존하는 성 중 가장 크고 아름다운 성이라고 불린다.
벽뿐만 아니라 지붕 기와도 회칠이 되어있는 외관은 우아한 흰빛 새인 백로를 연상시키므로 ‘백로성’이라고도 불리며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1993년 히메지 성은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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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성 망루 내부의 벽에 설치되어 있는 무구걸이.
적이 침입해 와 응전이 필요할 경우에 즉시 꺼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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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성 망루 지붕 위에 장식되어 있는 범고래는 성주의 위엄을 표시함과 동시에 화재를 방지한다는 주술적 의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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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돌담. 특히 굽은 모퉁이의 부분은‘부채형 경사’라고 불리어 상단으로 갈수록 수직에
가깝게 만들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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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내부로부터 공격하기 위한 작은 창. 총포를 쏘는 작은 창에는 원형과 사각형 외에도 다각형의 창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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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본성 망루의 입구에 만들어진 다섯 수문. 철로 된 격자, 은폐된 작은 창, 철판을 붙인 문 등 엄중한
구조로 되어 있다. 오른쪽/ 본성 망루의 지반으로부터 6층의 밑까지 이어지는 동서 2개의 큰 기둥. 본성 망루 전체의 균형을 잡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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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일본 최대의 도시인 오사카에 우뚝 서있는
오사카(大坂)성 망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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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성은 전란의 시대가 끝날 무렵인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전반에 걸쳐서 가장 발달하였다. 그리고 일본
전국에 위엄있고 아름다운 성이 많이 남아 있다. 그 중에서 특색 있는 대표적인 명성을 소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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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의 시대를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통치의 거점으로서 1585년에 지었다. 축성에는 하루에
2∼3만 명을 동원하여 2년에 걸쳐서 세워진 거대한 성. 본성, 둘째 성곽, 셋째 성곽의 돌담 길이는 12km에 이른다. 또한 본성의 돌담
일부에는 타코이시()라고 불리는 높이 5.8m,폭 14m의 거대한 돌이 달구로 사용되었다. 1615년 토요토미씨족이
멸망함과 동시에 오사카 성도 소실. 그 후 재건되었지만 1665년에 본성 망루가 소실되고, 1868년에는 성의 대부분 건물이 소실되었다. 현재의
본성 망루는 1931년에 오사카시(大阪市)에 의해 세워진 철근 콘크리트 건축.
*‘大坂’,‘大坂城’은 역사적 기술에서는‘坂’자가
사용되고 있으나, 현재는‘大阪’,‘大阪城’으로 표기한다. |
오사카(大坂) 성내 최대의 거석인 사쿠라몬(櫻門)의 돌 달구. 오카야마(岡山)의
이케다한(池田藩)이 이누시마(犬島)로부터 옮겨 온 것이라 한다. 사진=오가와 히로유키(小川弘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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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중심부에 위치하는 옛 에도(江戶)성. 1457년에 오타 도칸(太田道灌)이 지어, 1590년에 토쿠카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거성이 되었다. 1603년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연 후 대개축이 행하여 져 거대한 성이 되었다. 그 후, 1868년에
메이지(明治)유신으로 막부가 붕괴되기까지 에도 성은 장군가의 거성으로 정치의 중심이 되었다. 당시의 에도 성의 총면적은 대략 100만㎡로 세계
최대 수준의 규모를 자랑하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이 교토(京都)로부터 옮겨옴에 따라 에도 성은 코쿄(皇居)가 되었다. 현재 본성과 둘째
성곽, 셋째 성곽의 일부가 일반에게 개방되어 도민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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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 새로 세워진 코쿄 정문 앞에 있는 돌다리와 서쪽 성곽의 후시미(伏見)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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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야마죠(岡山城) , 오카야마켄(岡山縣)
12세기 중엽에 기초가 세워져, 1597년에 우키타 히데이에(宇喜田秀家)가 축성했다. 1603년에 이케다
타다츠구(池田忠繼)가 입성한 이래, 270년 남짓 이케다씨의 거성이 되었다. 현재의 본성 망루는 1966년에 외관을 복원한 것이다. 검은 칠
판자를 붙인 외관을 까마귀에 비유하여‘우죠(烏城)’로 불리며, 또한 본성 망루 지붕에 금빛 범고래 장식이 되어 있어 ‘킨우죠(金烏城)’로도
불린다. 에도시대에 성의 동북쪽에 있는 아사히카와(旭川)강을 사이에 두고 만들어 진 정원인 코라쿠엔(後樂園)과 함께 오카야마켄(岡山縣)의
관광명소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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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카와(旭川)강 너머로 보이는 오카야마(岡山)성망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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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0년 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盛政)에 의해 축성되었으며, 1583년에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의 거성이 된 후
14대, 300년에 걸쳐 카나자와(金澤)는 카가한(加賀藩, 현재의 이시카와현(石川縣))의 본거지로서 번창했다. 눈이 많은 지역에 있는 카나자와
성(金澤城)은 눈의 무게를 견디기 위하여 건물의 지붕에 나무 판자에 납을 씌운 연와(鉛瓦)를 사용했다. 1759년의 대화재로 성의 대부분이
소실. 그 후에도 잦은 화재가 있어 현존하는 건물로서는 당시의 카라메테몬(, 뒷문)이었던 이시카와몬(石川門)과 창고로서
사용되었던 산짓켄나가야(三十間長屋)외에는 성벽의 일부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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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자와(金澤)성의 동쪽을 방어하는 이시카와몬(石川門)과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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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80‘의 구릉 위에 있어 북쪽의 절벽 밑을 흐르는 키소가와(木曾川)강에서 올려다보는 경관이 아름다운 성.
1965년의 해체수리 때에 17세기 초의 건축이라고 확인되었다. 1617년의 증축에 의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3층의 본성 망루는 2층의 망대
위에 망루를 얹은 것으로 본성 망루를 지은 당시의 형태가 남아있다. 현존하는 본성 망루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라고 여겨져 국보로도
지정되어 있다. 전국에서 유일한 개인 소유의 성으로서도 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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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서 바라다본
이누야마 성(犬山城)의 본성 망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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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중국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독자적 문화를 만들었던 류큐(琉球)왕국의 성. 나카구스쿠 성은 15세기 중엽,
왕국을 섬기고 있던 고사마루(護佐丸)에 의해 완성되었다. 태평양을 내려다보는 높은 곳에 있는 나카구스쿠 성에는 아치상의 성문과 정교하게 돌을
쌓은 성벽이 남아 있다. 슈리(首里) 성을 비롯한 성터와 유적과 함께 2000년,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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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돌담과 견고한 성문이 남아 있는 나카구스쿠 성(中城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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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에 복원된 카케카와(掛川)성 망루는 카케카와 시민의 자랑이다. 왜냐하면 약 11억엔이라는 복원 비용의
대부분이 시민들의 기부로 충당되었기 때문이다. 발단은 시라키(白木)하나에씨라는 부인이 시에 기부금을 한 것이었다. “시민을 위해 써주기
바란다”며 선뜻 5억엔을 제공하였다. 아즈치(安土)·모모야마(桃山)시대에 축성된 망루가 1854년에 있었던 대지진으로 파손된 채 방치되어
오다가 1871년 신정부에 의해 행정구역으로서의 한(藩)이 폐지되어 망루를 헐어 버렸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시민들 사이에는 성을 복원하고
싶다는 뜻이 있었다. 그러던 중 시라키씨의 기부금이 있어, 시는 이것이 카케카와(掛川)성 재건의 좋은 계기라고 판단하여 시민에게 기부 협력을
구하였다. 그 결과 시민으로부터 총 2억 1,500만엔의 기부금이 모였다. 완성 후에도 망루 안내 등의 성 운영은 시민 자원봉사자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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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케카와죠(掛川城)의 운영에 참가하고 있는 시민 자원봉사자는 60대의 연장자가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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