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d>

 < 비즈니스 상식>

일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중 한사람  사카모토 료마  

arrow30_u.gif


역사의 가정은 무의미한 논쟁일지 모르지만

만약 일본에 사카모토 료마라는 인물이 없다면

지금의 일본은 없었을지도 한국의 근대사도 바뀌었지도 모른다--------

 

 

단: 사카모토 료마에 대한 언급에 앞서

료마에 대한 일본, 일본인의 평가와

한국, 한국인이 바라본 료마의 평가는 분명히 다르다

 

해석과 평가에 대한 문제는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이고

일본인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라고

상식적인 면에서 알고 있었으면 한다

ryoma.jpg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는 누구인가

 

675년동안 계속되었던 무사정권을 무너뜨리고 중앙집권적인 근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33살의 나이로 명치유신을 계획하고 일본 천하를 뒤집어 놓은 인물이다


29살에 명치유신에 뛰어들어 33살 암살을 당하기 전까지 4년간의 명치유신 활동으로

일본인에게 있어 가슴속 깊이 전설속에 영웅으로 남은 한국의 불멸의 이순신과 같은 일본인들의  영웅이다



일본 유력 일간지에서 ‘지난 1천년 동안 일본을 위해 가장 공헌한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인물이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이다

(참고: 2위: 오타 노부나가(織田信長), 3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4위: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5위: 요시타 시게루(吉田 茂)


 

료마의 출생과 성장과정

1835년 11월 15일 지금의 시코쿠[四國] 남부 고치현[高知縣]에 해당하는

도사번[土佐藩]에서 향사(鄕士)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청년시기에는 에도[江戶]로 가서 사다키치[定吉] 도장에서 검술을 익히면서

왕권 복구와 서양 척결을 주장하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주의자들과 교류한다.


1861년 고향에서 도사근왕당[土佐勤王黨]에 가담한 뒤, 이듬해 개혁파의 거두 가쓰 가이슈[勝海舟]를 죽이기 위해

다시 에도로 갔다. 그러나 오히려 가이슈의 설득에 감명을 받고 가이슈의 제자가 되어 그의 인생은 180도 바뀐다


 

● 메이지 유신과 료마

시대적 배경:

1853년 일본 에도만 우라가에 미국인 함장 페리 제독이 이끄는 군함 4척이 개항을 요구하며 상륙한다.

이로 인해 일본에 일대 변혁의 도화선이 되는 구로후네(黑船:증기선) 사건이 일어난다.

일본 전역은 서양인들의 신식 무기와 엄청난 체격에 혼비백산하고,

노쇠해진 도쿠가와 막부(幕府)는 아무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무능력하게 수수방관한다.

일본열도는 개국과 쇄국의 갈림길에서 피바람에 휩싸인다.



메이지 유신의 리더 료마

1866년에는 서로 대립 관계에 있던 사쓰마번과 조슈번[長州藩]의 동맹을 성사시켜

서양세력에 무능하기 짝이 없던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를 무너뜨릴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다.

이듬해에는 막부와 번을 통일시켜 에도막부가 천황에게 국가 통치권을 돌려준

역사적인 사건 대정봉환(大政奉還)의 구상을 성사시켰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 이래 675년 동안 계속되던 봉건시대가 끝나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통해 중앙집권적인 근대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1867년 11월 15일 친구인 나카오카 신타로[中岡愼太郞]와 함께 막부순찰대의 습격을 받아

교토에서 33살의 나이로  그의 생일날 암살당하게 된다.


 

● 메이지 유신과 조선

일본은 명치유신에 성공하고 7년이 지난후, 雲楊號(운양호) 군함을 몰고

미국이 일본인들에게 했던 것처럼 똑같이 조선을 침략했다.

그로부터 70여 년 동안 조선의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착취, 죽음이 시작되었다

 

 

arrow30_u.g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