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즈니스 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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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쇼인의 대표적인 제자:
▶출생과 성장과정 하급무사 집안에서 태어나, 5세 때 야마가류[山鹿流] 병학사범(兵學師範)인 숙부의 양자가 되었다. 1850년 병학연구를 위하여 규슈[九州]에 유학하였다. 이듬해 에도에 가서 사상가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에게 서양 학문을 배우고, M.C.페리의 흑선(黑船) 외교를 계기로 막부(幕府)에 대해 분노를 느끼며 존왕양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외국 유학을 결심하고 1854년 해외 밀항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여 투옥되었다. 숙부의 주쿠[塾]를 물려받아 1857년 자택에서 쇼카손주쿠[松下村塾]를 열었다.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晉作],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 이노우에 분타[井上聞多],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존왕양이 지도자들을 배출하여 이후 메이지유신의 주역이 되게 하였다. 1858년 양이를 주창하다 안세이[安政] 사건으로 감옥에 갇혔고, 이듬해 심문을 받다가 로주 마나베 아키카쓰[間部詮勝] 암살 계획이 드러나 에도에서 사형당하였다.
▶존왕양이운동 [尊王攘夷運動] : 일본 에도[江戶]시대 말기에 일어난 외세배격 운동.
존왕론은 일왕의 고대적 권위를 복원하려던 ‘천황숭배’ 사상이며, 양이론은 당시 일본과의 통상을 기도하려는 외세를 배격하고자 했던 봉건적 배외사상이다. 막부시대 말기에 막번(幕藩)체제의 모순이 첨예화하고 외세의 압력으로 외국과의 통상이 불가피해지자 이들 두 조류가 서로 결합되어 정치운동의 큰 조류를 형성하였다. 1853년 7월 미국의 M.C.페리가 군함을 이끌고 내일(來日)하여 통상을 요구한 이래 당시의 일본 조정은 외세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도막부의 고위 관료였던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천황의 칙허를 기다리지 않고 1858년 미국 등 여러 나라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막부 반대파가 세력을 규합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이들은 존왕양이를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황실이 있던 교토[京都]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여기에 하급 무사나 낭사(浪士)뿐 아니라 부농 ·거상 ·승려 ·신관 ·국학자 등도 참여함으로써 점차 세력이 커지더니 마침내 1866년 막부가 해체되고 이듬해 왕정복고를 이루었다. 이를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라 하는데, 이를 통해 존왕론은 그 목적을 달성하였다.
한편 양이론은 메이지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외국인을 살상하고 외국군과 대적하는 등 한때 크게 기세를 떨쳤으나, 그후 서구의 문물을 도입하여 일본을 개화하여야 한다는 인식이 급속히 확산됨에 따라 그 기반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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